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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3동

내고장 김해 바로알기

by 1학년1반 2024. 11. 20.

2024.11.19 

장유3 자치회에서 

김해의 역사를 좀더 세밀히 살펴보기위해

대성동고분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수로왕비릉  둘러보았다

대성동고분박물관

우리 일행이 처음 찾아간곳은 대성동 고분박물관 이었다

박물관입구

가야왕도 김해의 자랑 유네스코 세계유산

(1주년 기념식이 10월에 있었다)

으로 등재된 이곳을

이,통장단과 자치위원들

둘러본다는 것은 자치위원 으로써 역량과

김해시민 으로써의자부심도

느끼게 하는 대목인것 같다

야외전시관 안내문

야외전시관 에는 이곳 고분군의 특징인

가야초기(전기가야) 무덤형태 로

무덤위에 어느정도 세월이 흘러

(봉분의 모양이 사라질 때쯤)

(200년의 텀)다시 그위에 중복으로 무덤을 축조

했다고 하는데(1~5세기)

나의 상식으론

아무리 터가 좋아도(?)그러하진 않을듯 한데

아마도 그 시기엔 그럴만한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을 것이고

발굴당시의 고분군원형

이곳 해설사님의 말에 따르면 명이다해 묻어야할

왕족들이일거에 발생하였거나

이러한 중복축조 문화를 소유한

북방계이주설로 이해할수 있다고 했다

 

그외 묘지부족 이라던가

친족관계의 매장관습 일수도 

있다는 것인데

무덤주인은 아무말 없으니

학자들의 의견을 따를수 밖에

우리의 해설사님

그럼 퀴즈하나 내볼게요~하시더니

유네스코에 등재된 고분군은 몇개일까요?

그리고 그 위치는 어디일까요?

이렇게 물으며 어마어마한 상품을 줄것처럼 물어본다

대성동 고분군

(문제를 맞히면 1학년1반 블로그 1년 정기구독권 쏩니다~ㅋㅋㅋ)

 

국립김해박물관

두번째 찾아간곳은 국립김해박물관이다

고분군에서 이곳까지는 걸어서 20분정도 소요되고

만추의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길을 따라 걸을수도

있었지만 좀더 일찍가서 좀더 오래 머물며

김해의 역사를 알아볼려고(???)

버스로 이동하였다

히타이트 특별전 대형걸개

인류 최초 철기문명을 가진

히타이트는 생소한 제국인데

기원전17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존재했지만 존재감을 드러낼 만한 유산이 부재해서 

히타이트 제국이 존재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열심히 배우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실버님과 3동 자치회장님

19세기경 점토판 문자가 해독되면서

고대 히타이트가 주변 최강국 이었다고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다고한다

 

대형파노라마 스크린으로 소개되고있는 히타이트 문명

청동기를 거쳐 철기로 이어지는

문명을 가지고 있는 

히타이트 제국

봉헌용 그릇 (소꿉용 그릇같이 아기자기하다)

튀르키예 에서 날아온

낮선 제국의 이야기를

살펴 본다는것이

여간 힘든일이 아니란걸 알게 되었다

이집트의 투탕카멘의 무덤처럼

유산과 문명을 일찌감치 연구하고

발표하고 알아보기 쉽게

짠~ 하고 나타나면 좋으련만

제국의 삶과 문화

 

이제서야 히타이트 제국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하니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다양한 토기들이 전시되어있다

히타이트의 이야기들은 

언제쯤 그 완성도가 높아질지 알수가 없는듯 하다

오백년의 제국역사를 어찌

그릇이나 청동검,점토판 으로

"퉁=3" 칠수 있겠는가

아무쪼록 히타이트 오백년 세월을 

충실하게 연구하는 학자님들이

세계여러곳에 계시길 바래본

또는 이해할수 있는영화한편 청해본다

국립김해박물관

거기서 거기인 거리를 이동하면서 불암동 위원님들의

소개를 받기가 무섭게서로 헤어지긴 했지만

다음의 어떤 행사에서 마주친다면

어색함은 조금 누그러 지리라 생각한다

 

홍살문

세번째 로 찾아간곳은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허황후)을 만나볼 차례이다

여기에서도 우리일행은 해설사의 도움을 받았다

뭐~ 네가지 였던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1)김해김씨와 김해허씨는 사돈안되고

(인천에 어느성씨 하나더 있다고 하던데)

2)수로왕보다 9살 연상이고

3)장군차 씨앗을 혼수로 가져왔고

4)우리나라 1호 글로벌 다문화가정 

 

파사석탑 과 해설사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 공주가

배를타고 먼길을 떠나는데

거센 파도와 돌풍을 만나면 위험하니

파사탑을 배에 싣고 왔다고 하는데

저렇게 우리가 느끼는 탑의 모양보다

돌덩이에 가깝게 된이유는

파사탑의 돌을 가지고 가면

어부는 파도의 위험이 사라지고

자식을 기다리는자 자식을 얻게 된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부터라고 한다

이석탑은 첫해외 수입품 이 아닐까 하는 생각?

허황후릉

원래는 수로왕의 사후릉 으로 사용예정이었는데

연상인 허황후가 먼저 명을 다하자

자신의 릉까지 아내에게 양보하는 사랑으로

허황후의릉 으로 쓰이게 되었단다

어린이박물관 포토존 에서 어른이가 뱃놀이중

 

철수가 놀고 있으니 영희도 같이논다

해설사분들의 구전을 그대로 옮기기엔

주의집중으로 듣질않았기 때문에

백퍼 정확한 이야기가 아닌것을 밝힙니다